봉서재 [鳳棲齋]
말 뜻대로 봉황새(수컷)가 사는 서당.
봉황은 고대 중국의 전설에서 유래된 상상의 새로 어질고 현명한 성인과 함께 세상에 나타나는 새이다.
수컷을 鳳(봉) 이라하고, 암컷을 凰(황) 이라고 하지만 본래는 암수를 구분하지 않고 '봉'자만을 사용하였다.
조치원읍에서 공주 의당 방면으로 나 있는 604번 지방도로를 따라 고복저수지쪽으로 약 10km정도 가다보면,
고복저수지 못 미쳐 좌측에 작은 산이 있는데, 이 산이 비룡산(飛龍山)이다.
산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 고복리 동고 마을인데, 앞 개울의 다리를 건너 약 700m 정도 가면 산 아래 봉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봉서재는 1600년대 말 봉옹(鳳翁) 장원주(張元, 1634~1700)가 만년에
창건하여 자제와 인근 마을 학동들을 교육하였던 서당이다.
봉서재가 건립된 것은 장원주의 만년인 1680~1690년대로 추정되는데,
이는 동면 노송리에 있는 결성장씨의 문중서당인 육영재(育英齋, 옛 송동재)와 비슷한 시기이다.
초기의 봉서재는 현 위치의 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구서당”이라는 골짜기에 있었으나,
1918년 장기칠 등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고, 구서당터는 현재 복숭아밭으로 변해 있다.
현재 건물은 봉서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우측에 작은 창고가 있다.
정면에 걸려 있는 ‘봉서재(鳳棲齋)’ 현판은 애국지사인 묵재(墨齋) 홍일섭(洪日燮)이 쓴 것이며,
우측 마루에는 1918년에 장기칠(張箕七, 1850~1937)이 지은 「봉서재기」와 1922년 류인철이 지은 「봉서재이건기」가 있으며,
유림들이 지은 시 10여 편을 판액하여 걸어 놓았다. 서당계문서와 도조기, 교지, 서책 등이 남아 있다.
*출처 : 연기향토박물관 블로그_http://blog.daum.net/yghmuseum/7276191
봉서재는 결성장씨 봉옹공(鳳翁公) 원주(元冑:1634~1700)가
고복리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비문은 전한다.
장원주는 이름 난 효자로
포상 및 복호(復戶-조선 시대에, 충신·효자·군인 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하여 주던 일)를
받았으며 증군자감정(贈軍資監正:정3품으로 군수관계 장교 직책)에 올랐다.
봉옹공의 고향은 결성장씨 연기파가 정착한 동면 송곡리(松谷里, 현 노송리)로
만년에 외가가 있는 서면 고복리로 이주,
산세가 좋은 비룡산 기슭에 최초의 서당을 지으니, 이름 하여 봉서재였다.
서당의 1800년대 훈장으로 전해지는 인물은 장성갑, 장술선, 장태산 등이 있었고,
특히 류인철은 1906년에 동광학교(東光學校)라는
신식학교를 세워 측량과를 두었으며 시대에 적합한 천문학 등을 교과목으로 가르쳤다.
아울러 그는 배달가(倍達歌)라는 교가까지 작사, 작곡 하는 등 근대적인 신식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초기의 봉서재는 500여 미터 위 비룡산 산기슭에 있었으나
1918년 봉옹공의 후손인 장기칠에 의해 현 위치로 이축되었다.
원래의 서당 터는 구서당으로 불려진다. 그 밑에 최근 상수도 물을 공급하는 탱크 시설이 들어섰다.
봉서재는 낡고 퇴락하여 2003년 군 예산으로 전면 해체, 복원하였다.
봉서재 유고로는 기철이 1918년에 서당의 내력을 기록한『봉서재기(鳳棲齋記)』와
1922년 류인철이 지은『봉서재이건기』가 있으며, 지역 유림들이 지은 10여 편을 목판에 새겨 걸어놓았다.
[출처] 결성장씨 봉서재와 봉옹공 원주 |작성자 청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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